나는 나 스스로 스릴러 매니아라고 자처하지만 매번 스릴러만 보는 건 불닭볶음면을 매일 먹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자극적이긴 하지만 그 자극을 계속 견디기가 힘에 부치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불닦볶음면을 계속 먹어도 속이 쓰리거나 하지 않았는데 이젠 속이 쓰리고 며칠 쉬어줘야 다시 먹거나 할 의욕이 생긴다. 스릴러 영화도 중간중간 드라마, 로맨스 같은 장르의 영화를 끼워넣어야 다시 새로운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나 이 영화는 담백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 혼자 조용히 주말에 앉아서 보기에, 스릴러로 자극된 나 스스로를 차분하게 가라앉히기에 너무도 좋은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내가 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건 주인공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와서 살고 있는 외국인으로서의 (그린카드를 받긴 했지만) 정체성을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중간 나오는 뉴욕 풍경은 또 너무 예뻐서 재작년에 다녀왔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니 이래저래 내 자신을 투영하면서 보게되었다.
주인공인 노아가 어릴적 좋아했던 해성을 만나기 위해 걸린 20여년의 시간의 크기는 사실 나에겐 일어날 일도 없고 그래서 더욱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미국에서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한국에서 정을 떼는 그 모습은 아마 외국에서 살고있는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가족과 친구들이 거의 한국에 있고 지인 없이 미국을 혈혈단신으로 왔기에, 한국 지인들과 연락하면서 하던거 다 던지고 한국 다녀오고,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안했던건 아니기에 공감이 많이 됐다.
결국 노아와 해성의 시간은 어긋나게 되고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 서로 다른 인연을 맺게 되는부분은 라라랜드의 결말이 생각나게 만들었다. 다행인점은 라라랜드와 다르게 주인공 둘과 파트너까지 함께 만나서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랄까. 아니다, 라라랜드를 봤을 때는 주인공이 스쳐지나가서 먹먹한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들이 만났음에도 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장면이 너무 가슴아팠다. Childhood sweetheart라고 하기엔 꽤나 큰 존재였던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놓아주는 장면은 이번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선 인연이라는 단어가 많이 언급된다. 인연이란 수천번의 전생을 거쳤기에 옷깃이라도 스쳐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고 이를 통해 서로 알게된 사람들 사이 관계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인연은 그들 스스로 평가하기를 '여기까지인' 인연이라고 한다. 서로 좋아했지만 이뤄지지 않은 정도의 인연이라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는 그들의 관계는 결국 다음 생에서 더 나은 관계로 만나자는 헛된 희망만 남겨두고 끝나게 된다.
마지막 그들의 포옹의 의미는 뭐였을까. 처음 뉴욕으로 온 해성을 노아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노아가 먼저 와락 안고, 뒤로 두어발짝 물러났다가 다시 안는다. 그리고 해성이 떠나기 전, 이번엔 서로 주저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해성이 노아를 안아주게 된다. 포옹을 하려고 다가가는 쪽이 더 보고싶어 했던 쪽이라고 생각해보면 노아는 뉴욕으로 온 해성을 만나서 너무 보고싶었고 반가웠지만 같이 시간을 보낸 후, 이제 배우자까지 생긴 입장에서 언제다시볼지 모르는 해성을 보내는 순간에선 이제 놓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끊어내고자 포옹을 주저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해성이 이번엔 먼저 포옹을 하며 그들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님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것도 그들 사이 인연의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여년이 지나서도 만날 수 있었던 질긴 인연이기에 놓으려고 하면 더더욱 아플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에 그들은 언젠가 또 만나지 않을까하는 묘한 기대감을 결말에서 느꼈다.
자연스레 나의 인연은 어떤가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연이 다해서 끊어지기도 하고 연을 잡아보려 했으나 그마저도 녹록치 않았던 경우를 많이 경험했다. 아직도 쉽진 않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길 바라진 않는다. 그리고 관계를 맺고 끊음이 남은 내 인생에서도 쉽진 않았으면 좋겠다. 쉽게 맺지않고 쉽게 끊지 않는 관계,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더 생각하고 언제봐도 기분좋은 관계, 길게 오래보는 관계로 남아서 지낼 수 있다면 후회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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