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또 틀렸다. 마이너스 빼기 마이너스는 플러스라고, 분배법칙 때 이거 빼먹어서 틀린다고 과장 조금 보태서 100만 번쯤 이야기 한 것 같지만 또 틀려서 내 빨간 볼펜은 학생에 교재에 동그라미 대신 장대비를 내리고 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이야기 한다.
'자 봐봐, 우리 분배법칙은 이 괄호 앞의 숫자를 안에 있는 숫자들에 나눠주는거라고 했지?, 그리고 여기 부호가 마이너스니까 이렇게 되면 플러스가 되어야 하는거야 그치?'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눈치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문제를 똑같은 이유로 틀린다. 되짚어보면 나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때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런 우리를 인내하셨던 것일까.
저 뒤에서 다른 친구가 '선생님 13번 답 960!' 하면서 외친다. '응 아니야~' 하고 잠시 뒤돌아서 '그거 계산 잘못됐어 다시 한 번 풀어봐' 하고 설명하던 분배법칙을 다시 설명한다. 아마 다른 친구가 들어와도 또 똑같은 것을 틀릴 것이다.
#2.
학원엔 정말 다양한 친구들이 온다. 가장 상대하기 좋은 건 고등학생이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때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의욕도 초, 중학생보다 넘치고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도 하려들지 않는다. 오로지 강의에만 집중하면 된다.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이대다.
그 다음은 중학생이다. 대체로 말을 잘 듣고 심리적인 여유가 가장 묻어나오는 것 같다. 학원에 자기들이 왜 오는지도 납득하고 오는 분위기이다. 시험기간이라 눈에 묻어있는 피곤함은 고등학생과 매한가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초등학생은 같이 유치해지던가, 나만 엄격해져야 한다. 입만 열면 '아니~' 하며 아니시에이팅을 시전하는 초등학생은 틈만 나면 책상에서 90도 회전해서 옆을 바라보거나 고개까지 돌려 뒤를 바라본다. 한 문제 풀면 대단한 것을 한 양 답을 외친다. 그나마 이건 체력이 남았을 때 이야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피곤하다 싶으면 두 시간 하러 오는 학원에 몇 문제 풀지도 못하고 집에 가버리기가 부지기수다.
코로나 이전에 학교에 못나가서 학원만 나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으나, 학교랑 병행하려니 체력이 힘에 부치나보다. 아무렴, 나도 오전에 다른일 하다가 학원에서 너희 가르쳤으면 체력이 남아나지 않았을거야..
'아니~ 선생님 이게 답이 안나와요 진짜라니까요' 라며 다시 아니시에이팅을 하는 친구에게 다가가 손수 나눗셈을 도와준다. 자 봐봐 여기서 이렇게 되니까 나누어 떨어지지? 얼른 다시해봐~
'아니~ 이게 왜 난 안되지?' 하며 다시 연필을 잡는데 가끔 귀엽다. 바쁠 때 저러고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하다. 개인 과외로 돌리면 어르고 달래서 얘만 케어해보겠지만, 다른 애들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괜시리 나까지 화가 날 때도 있다. 같은 시간대에 오는 초등학생이 다른 애들이 떠든다고 '기껏 돈내고 왔는데 저러면 쓰나 쯧쯧' 하며 혀를 차지는 않겠지만, 믿고 보내주신 학부모의 입장에 나도 모르게 몰입이 되는 것이리라.
#3.
다른 반을 맡게 되면 어색한 감정의 기류가 한차례 지나야 서로 가까워질 수 있다. 질문도 하던 선생님한테만 하고, 나를 경계하는 듯 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가령 다른 선생님이 질문 받느라 바쁜데 자기도 얼른 풀던거 알고 넘어가고 싶을때, 나를 찾아서 질문을 해주고 답해주다 보면 어느새 스스럼 없이 질문을 하고 받아주게 된다. 근데 학생이 먼저 다가가는 것 보다는 선생입장에서 다가가는 것이 쉽기에 먼저 '뭐 안풀리는 문제 있어요?'라고 물어주는 게 마음 편하긴 하다.
간혹 친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 말고 다른 선생님을 찾다가, 마침 나랑 눈이 마주쳐서 손을 들다마는 그 어색함이란..
#4.
학원 선생님 입장에서 가장 듣기 좋은 말은 '선생님 저 졸업 할때까지 다른 데 가면 안돼요!' 라는 말일 것 같다.
난 들어간지 얼마 안됐기에 학생들을 오래본건 아니지만, 간혹 오래 다닌 선생님과 오래 다닌 학생의 유대가 쌓여 '아 선생님 진짜 저 졸업할 때까지 그만두시면 안돼요 알겠죠?' 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휴 너 졸업할 때면 내가 몇살인데' 하며 너스레를 떨지만 뒤돌아서 씨익 웃는 모습을 여러번 보았다. 나도 좀 더 오래하면 그 말을 들어볼 수 있으려나.
#5.
학원에서 일하면 저녁을 먹을 수가 없다. 오후 느즈막히부터 가서 9-10시까지 해야하기 때문이다.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젠 좀 다녀서 그런지 노하우가 생겼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굶었다. 점심 적당히 먹고 갔다와서 먹어야지 했는데, 커피 한잔으로 버티다가 퇴근하면 당이 떨어져서 머리가 띵할 정도길래 이건 아니다 싶어서 뭔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가서 먹으면 더 많이 먹고, 금방 잠들게 되어서 부대끼고 수면의 질이 나빠지는 탓도 컸다.
그래서 날이 추울 때는 바나나를 갈아서 가지고 다녔다. 잠깐 짬이 날때 후다닥 먹고 온다음 챙겨온 가글로 후다닥 마무리한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들어가면 퍼-펙트. 그리고 퇴근해서 주전부리 약간 하면 다음날 컨디션에 별로 영향이 없다.
근데 날이 더워지니 가져온 동안 이게 맛이 가는 것 같길래 미숫가루로 바꿨다. 포만감이 괜찮다. 가루만 적당히 덜어서 챙겨갔다가 물 타서 휘리릭 먹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가끔 설탕을 한스푼만 넣어갈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살 찔까봐 그냥 닝닝한 채로 먹고있다.
이런 시간대에 일하는 것의 장점은 평일 약속을 잡을 수 없다는 것. 저녁 약속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은 돈을 아끼게 된다는 것인데, 장단점이 있지만 뭐 점점 더 지인들이 직장인이 되어가는 추세라 주말에 보는 게 서로 속편하니 장점이 점점 커지는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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