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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박사과정 함께하기

5일간 화학자들과 아침부터 밤까지 부대끼는 빡센 학회, Gordon Research Conference, GRC Organometallic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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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여러번의 학회를 다녀오면서 개인적으로는 그 방대한 규모로 위용을 과시하는 ACS meeting을 좋아했다. 위치도 샌프란시스코, 샌디에고, 뉴올리언스 등 핫한 관광지에서 열릴 뿐더러 컨벤션센터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만 들을 수 있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컨퍼런스가 학회의 정석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기회가 닿아 Gordon Research Conference, 흔히 GRC라고 불리는 학회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너무도 ACS와 다른 매력으로 내게 다가와서 당장 또 가고싶어진 학회가 되어버려서 이 후기를 남기고자 한다. 


GRC는 Gordon이라는 사람이 처음에 어떻게 하면 같은 분과에 있는, 특히 같은 주제를 연구하는 더 소규모 집단끼리 모여서 토론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만든 학회라고 한다. 처음에 존스홉킨스에서 하다가 이제 여러 분과에서도 이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점차 넓어지게 되었는데 지금은 300여개의 소분과로 이루어진 GRC가 미국 전역에서 열리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분과는 매 년, 어떤 분과는 한 해 걸러 한 번 으로 들었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가장 ACS meeting과 다른 점은 소규모 인원으로 (~200명 내외), 해당 분과의 대학원생, 포닥, 조교수, 교수, 기업체 직원들까지 모여서 열띤 발표와 토론을 벌인다는 것이다. 내가 다녀온 GRC는 organometallic 인데, 이건 많고 많은 inorganic chemistry 분야에서도 작은 분야라 정말 내가 맨날 읽던 논문의 저자와 교수들이 모인다고 생각하면 쉽다. 그래서 참석자 명단과 포스터 명단, 스피커 명단이 공개되었을 때 이미 이들을 만날 생각에 들떠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떤 가수의 팬이 가수를 콘서트에서 만나기 전에 음원으로 접하듯, lol의 팬인 유저가 유튜브에서, 리그 중계로 접하듯 학계에 있는 사람들은 논문으로 세계 여러 연구그룹의 대학원생과 교수들을 접하게 되는데, 결국에 우리가 콘서트가서 가수들 공연 직관을 하고, 롤챔스 결승전을 보러가서 직관을 하듯, GRC에서 그들을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ACS도 이게 불가능 한 것은 아니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시간이 촉박해서 이렇게 '직관' 하는 기회가 사실 흔치 않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GRC는 정말로 큰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발표자료는 외부유출이 금지되어있다

특히나 나도 박사과정 5 년차에 접어들고, 여기에 오는 대부분의 대학원생도 최소 3년차, 거의 대부분 내가 만난 사람들은 4년차, 5년차 박사과정생이었다. 각자 자기 이름으로 달린 논문 하나씩 포스터에 박아넣고 들어오는데, 내가 트래킹하던 그룹의 그 1저자들과 눈앞에서 얘기하게 되니 굉장히 할 얘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어떤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면 그 그룹의 지도교수만 언급해서 발표하고 1저자는 신경을 안쓰는데, 이제 여기 신경쓰지 않았던 저자들과 논문이 매칭이 되면서 그들의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기타 대학원생, 그룹 분위기, 그 그룹에서의 생활 기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정말로 즐거웠다. 내 논문을 읽고 알고 있었다는 사람들도 있어서 정말 놀라웠고, 굳이 알고 온 게 아니더라도 포스터를 발표하면서 nice work, beautiful work 라며 치켜세워주는 사람들 덕분에 더 즐겁게 임할 수 있었다. 특히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이바닥에서 구르다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뭐가 대단한지 더 잘 들어오는지라 더더욱 내 노고가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네트워킹의 장이 사실 GRC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GRC는 물론 가장 최신 연구 동향을 알게 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비슷한 분과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직접 만나서 알아보면서 인간대 인간으로 네트워킹 하는 시간을 가지게 해준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이 기회를 활용하고자 거의 모든 끼니마다 다른 사람들과 may I join? 이라고 외치며 식사하는 사람들을 어떤 특정 그룹으로 한정짓지 않으려고 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우리 그룹에서 단독으로 GRC에 다녀왔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다른 그룹에선 네 다섯명씩 온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 대체로 식사자리나 다른 활동을 그들끼리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나도 우리 그룹에서 몇 명 같이 왔으면 그랬을 것이다. 물론 매번 다른사람과 밥먹는 것이 녹록치는 않지만 어차피 나처럼 혼자 온 경우도 많아서 금방 친해지고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또한 대학원생 뿐만 아니라 포닥, 갓 임용된 신규 교수들, 나아가 분야의 걸출한 대가들까지 말을 섞을 기회가 생겨서 더욱 좋았고 비단 연구주제가 아니더라도 서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아서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랩에서 있었던 사건 사고들, 기타 고민사항들이 장소와 시간만 다를 뿐 모두에게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어서 이런 고민을 나누기 더 수월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grc에 오고나면 같은 분과의 grc를 계속해서 온다고 들었다. 걸출한 대가들도 어지간한 일정이면 이걸 맞춰서 오는 것 같고, 와서 여러사람들과 며칠 묵으면서 회포도 풀고, 연구에 대한 진중한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굉장한 메리트같았다. 물론 ACS에서도 어느정도 자리잡은 교수들이라면 만나서 밥먹고 할 수 있겠지만 GRC의 경우는 아예 학교 기숙사를 통채로 빌려서 200명가량을 가둬놓고 5일간 수련회, 수학여행 하듯이 지내기 때문에 그 만남의 양과 질이 ACS의 그것들과는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ACS가 어디 뽐내기는 좋아도 GRC만큼의 퀄리티는 따라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좋은 연구결과 생길 때마다 부랴부랴 포스터 뽑아서 매해 grc를 가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회 열리는 학생회관(?) 바로 앞에 이런 바닷가가 보인다. 옥수수밭에서 온 나에겐 기가막힌 광경

내가 이번 GRC가 좋았던 이유는 이곳이 미국 동부의 로드아일랜드 (Salva Regina University, New Port) 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올드 머니가 몰리는 듯한 요트와 랍스터가 즐비한 이 바닷가에 대학교 기숙사를 빌려서 GRC를 열기로 했다는 생각 자체가 일단 너무 맘에 들고, 남는 시간에 다운타운이나 바닷가를 돌아다니는 시간이 굉장히 즐거웠다. 다른 GRC는 또 다른 곳에서 열리겠지만 덕분에 미국 동부 바닷가 구경도 정말 실컷할 수 있는 기회였고, 배움의 장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경험의 장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학계에 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GRC에서 네트워킹을 하는 기회는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니까 기회가 온다면 꼭 잡아보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밤을 수놓았던 별바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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