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다른 사이비 종교가 생겨나는 과정은 기독교와 불교가 다른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성경에 대한 해석을 자기 식대로 스리슬쩍 해석하는 것이 포인트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경이 엄청나게 디테일하게 적혀있지 않고 모호하게 나온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성경이 이래서 이랬다더라 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부분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그런 빈틈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클래식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다. 지금까지도 수 많은 지휘자의, 솔리스트의 해석이 여러 작품에 녹아들어서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새로운 해석이 끼어들 틈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해석을 넣는 건 마치 라면 끓이는 것 같은 행위이다. 라면을 사서 먹을 때 누구는 조리법에 적힌대로 4분을 끓이고 물 500cc를 맞춰서 끓이지만, 우리는 살면서 라면을 이렇게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수도 없이 느끼지 않는가.
가령 템포만 해도 4분음표 = 120 이런식으로 구체적인 숫자를 주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빠르기들 presto, allegro, andante 등으로 적기 때문에 여기서 더 빠르고 느리게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또한 셈여림도 적힌 파트가 있고 아닌 파트가 있는데 이 사이를 어떻게 메꾸는지가 또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겠다. 그 외에 어떤 파트를 더 살릴지라던가, 얼마나 날카롭게 연주할지, 프레이징을 어떻게 살릴지 등등 무수한 가능성이 악보 안에 열려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개별적인 해석이 싫었던 말러는 악보에 엄청나게 디테일한 지시사항을 넣어뒀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과 악단이 바뀌어도 어느정도 일관된 연주가 가능하게끔 만든 느낌이 있으나, 지금도 여러 음반이 발표되는 것을 보면 여전히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가보다.
악보에 적힌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의 해석을 끼워 넣는 연주도 많다. 이것이 맞다 틀리다의 잘잘못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악보와 다르게 곡 해석을 했으면 그게 신선하면서도 타당하다고 느낄 수 있게 곡 전체에 자신의 생각을 일관되게 집어넣어야 대중의 혹은 평론가의 호평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도 저도 아닌 해석은 반감만 불러일으키고 묻혀버릴 것이다.
살아가는 데에도 일관된 태도로 보여주는 내 삶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 것 같다. 그 해석이 시간에 지남에 따라 바뀔 수는 있다. 카라얀이 베토벤을 여러번 녹음한 음반을 들었을 때 각각 차이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삶의 방향에 대한 해석을 바꿨을 때 이를 다음 해석이 있기 전까지는 일관되게 가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비단 주위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애매한 태도로 지내다보면 뒤돌아 봤을 때 내가 내 삶이라는 음반을 다시 듣고 싶어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내가 삶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하게 됐을 때 '우와 내가 예전엔 이런식으로 생각했었네!' 하고 후회가 아닌 신선함과 새로움으로 존중해줄 수 있는 시간으로 지금이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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