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클래식 곡을 들으면 자기 파트에 맞춰서 집중하는 것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멜로디 선율에 더 강한 끌림을 느끼고 더 잘 기억하는 편인 것 같다. 연주했던 곡이면 더 그렇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체로 높은 성부에서 멜로디를 가져가는 경우가 많기에 더더욱 아래 깔리는 선율은 안들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안들리던 선율이 귀에 꽂히는 순간이 있다.
베토벤 교향곡 5번에 피콜로가 등장한다는 사실 알고 계시는가? 학부 때 베토벤 5번을 처음 연습하며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할 당시에, 난 5번 4악장 말미에 피콜로가 나오는 줄 상상도 못했다. 오케 단장을 하면서 많이 들어봤다고 생각했었지만 객원 논의를 할 때 피콜로를 불러야 하지 않겠냐던 악장 형의 말에 '읭 피콜로요?' 하고 되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아예 특정 파트가 있는 줄도 몰랐던 적이 있던 반면 함께 연주하고 있는 파트의 숨겨진 (나한테만 숨겨진 것으로 느껴졌던) 선율이 있다. 가령 드보르작 교향곡 9번의 4악장의 중반부 쯤에서 바이올린이 떠들고 있으면 거기서 묵직한 베이스가 첫 주제선율인 미~ 파솔 파미미~ 를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연주를 했던 곡이기도 해서 트럼펫 선율과 바이올린의 미파솔레시레 미파솔레시레 하는 선율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베이스 선율이 귀에 꽂히게 들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 마치 작곡가가 숨겨놓은 선율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한번 더 그 곡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의 2악장에서도 전체 선율이 상승으로 치달을때, 여기서 관악기와 베이스가 정반대의 하강선율을 그리는 부분이 들렸을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사실 진작에 들었어야 할 부분이었을 것 같은데 늦게 듣게 된 것을 한참이나마 아쉬워했다.
이런 부분들이 들리는건 대체로 내가 내 파트를 연주할 때가 아니라 음원이나 연주를 들으면서 내 파트에 덜 신경을 쓸 때이다. 내가 연주할 때는 경주마 같이 내 파트만 보고 안틀려야지 박자만 세었지만, 이를 내려 놓고 감상의 위치로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선율이 굴러가는지 더 자세히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행위 마저도 이렇게 시간에 따라 감상의 포인트가 넓어지는데, 나이 먹는 것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전에는 내가 내 것 하기에 바빠서 주변 신경을 못쓰다가 어느새 돌아보면 이게 이래서 이랬구나, 저건 저래서 저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내 인생 속 숨겨둔 선율을 발견한 느낌이라 좋기도 하면서, 앞서 느꼈던 음악을 들을 때 느꼈던 안타까움처럼 그 당시의 내 모습이 사뭇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연주 할 때는 이런 부분이 보완되는 지휘자 선생님들의 디렉팅이 있었다. 내가 내 연주에 바쁠 때 (대체로 연습부족으로 손가락 굴리기 바빴거나 활이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자 지금은 힘을 빼고 다른 파트를 들어줄 때라고 혹은 이쪽 파트들 선율 주고받는 것 들어보시라고, 아름다운 선율 들어주시라고 하시던 그 디렉팅이 내 인생에서도 아마 계속 있었을 것이다. '야 그거 멜로디 아니야!', 물론 합주 외적인 디렉팅을 내가 여태까지 잘 받아들이고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살면서 더 얼마나 이런 스스로에 대한 '뒤늦게 깨달아서 오는 안타까움'을 느낄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이런 안타까움은 대체로 그 안타까움이 안타까움이었음을 깨달았다는 나름의 기쁨과 같이 오다보니 '웃픈' 느낌마저도 들고, 아마 더 많이 느끼면 더 많이 안타까울 것이다. 그러면 내가 곡을 바라보는 감상의 폭이 넓어지듯,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폭도 조금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물론 그러려면 내 파트 악보에 적힌 것만 열심히 하지 말고 다른 사람 뭐하나도 슬슬 보면서 (연습은 미리 해두고) 발맞춰서 멋진 앙상블을 만들어 내게끔 하려는 노력을 연습실 나와서도 부단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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