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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생각

포항공대, 연세대 대나무 숲에 올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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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대숲 글 박제용

#포대숲10901 #학업 #진로

대학원에 신입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

먼저 대학원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대학원은 도제식 교육이고 교수의 권한이 막강하기에 운이 나쁜 경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삶만 피폐해질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괜찮으신 분이더라도 선후배와 연구실 환경, 연구비 상황에 따라 아무런 배움도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쓸쓸히 대학원을 떠나오는 경우를 정말 많이 봤습니다. 교수/사수가 아무 것도 모른채로 말도 안되는 일을 시키고, 이후 필요한 지적/물적 지원을 전혀 해주지 않으며 알량한 자존심으로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대학원생에게 남는 것은 자퇴와 데이터 조작의 유혹밖에 없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경우로 학위과정을 마치지 못한 모든 분들께 위로를 전하며 혹여나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인지 현재에도 고민하는 분들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행히 위와 같은 경우에 속하지 않는 분들께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성취가 점수와 학점으로 정량적으로 계량되던 학부와는 달리 대학원에서는 자신이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어렵고 방심하다가 아무런 발전을 하지 못하고 소위 물박사가 되어 졸업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 짧은 연구 경험상, 대학원 생활은 그 사람의 목표에 상당히 걸맞게 끝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많이 알고 싶어하고 더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많은 경우 그 목표를 향해 느리게나마 다가갑니다. 교수님이 시킨 일을 적당히 잘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교수님이 시킨 일을 적당히 잘 하는 사람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랩 미팅때 교수님께 혼나지 않을 정도의 데이터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그런 데이터를 생산하기에 최적화된 사람이 됩니다. 진짜 일을 하세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일을 하세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붓더라도 일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일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합니다. 운을 걸어본다면 전자에 걸어봅시다.

일과 생활의 균형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 9to9과 같이 시간을 강제적으로 정해놓는 연구실과는 잘 맞지 않습니다. 노동이나 사무와는 다르게 연구는 일하는 시간의 총량과 성과가 비례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반면 시간을 너무 적게 투입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학원 생활에서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정말 제대로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저의 조언은 위와 같이 목표지향적인 태도를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실험 셋팅을 하는 데만 8시간이 걸리는 연구실에서 열심히 실험 셋팅을 한 후 1시간 정도 실험을 하고 6시 정시퇴근을 하는 것보다 기왕 준비된 김에 3~4시간 실험을 하고 다음날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들어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아플 때 굳이 출근해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하루 푹 쉬고 멀쩡하게 다음날 나타나 더 집중해서 일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식사시간 1시간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가끔은 쿨하게 2시간이고 3시간이고 보내고, 반대로 가끔은 집중을 위해 우유 한잔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논문만 파고 있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일이 삶의 전부는 아니므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퇴근하고 적당히 졸업하는 것도 하나의 목표가 될 수 있고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목표 설정이 의식적으로, 명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아무리 뛰어난 교수라도 연구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교수는 처음에 방향성을 설정해주고 중간에 길에서 너무 벗어났을 때 살짝 방향을 틀어주는 역할이지 연구를 주도할 사람은 나여야합니다. 대학원생이 학위 과정동안 지도교수가 자기 연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박사학위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2~3년차가 지나면 저 생각이 밥먹듯이 떠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잘 모르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다면 그 기술을 이해하여 주의할 점을 공부하는 것 또한 대학원생의 일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어설프게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를 논문에 넣었다가 전문가 referee에게 극딜을 당하고, 체면 때문에 교수님께 그 referee의 무지함을 탓한 후 다른 저널에 그대로 투고했다가 다른 전문가에게 또 극딜을 당하고... 논문은 구천을 떠돌다가 졸업은 멀어지고... 운 좋게 어딘가 게재는 되었는데 본인도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발표하는게 굉장히 꺼려지고... 생각보다 흔한 일입니다. 박사과정은 한 명의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는 길입니다. 내 데이터에 기술적인 문제는 없는지, 이 데이터로 어디까지 주장을 할 수 있는지,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 데이터로는 어떤 것이 있을지 세세한 부분은 대학원생이 고민해야할 부분입니다.
교수님은 내 연구 내용을 기억조차 제대로 못할 가능성이 높고 세세한 부분은커녕 큰 줄기도 일관성 있게 잡아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미리 고려하지 않고 교수님이 가져오라는 데이터만 마련해놓을 경우 높은 확률로 실제 논문 작성시에 논리적 결함으로 인해 크게 혼나고 모든 실험을 다시하거나 억지로 논리적인 비약을 애써 감추며 졸작을 어딘가에 쑤셔넣으며 졸업을 하게 됩니다. 졸업즈음에는 자기 연구에 대한 모든 기술적, 논리적 요소들을 홀로 판단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물박사가 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박사가 되었다면 당신은 전문자료를 찾고 읽고 이해하고 그 신뢰성을 파악하며 빈틈을 찾아 향후 더 필요한 연구에 대해 코멘트를 하며 필요한 경우 실험 디자인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수십 년간 끊임없이 공부해야겠지만 당신은 독립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기보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박사과정에 도전하지 않나 합니다.


연대숲 #36821번째 외침:

2015. 10. 24 오후 10:25:33

넓은 백양관 대강당에 자는 사람이 반, 강의를 듣는 사람이 반. 
백발의 교수님은 느리지만 차분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나는 여러분 나이 때 삼수를 했습니다.'


옆 사람이 움찔하면서 잠에서 깼어요. 삼수?
여기저기서 뜨이는 눈들을 보신건지, 교수님의 눈가에 살짝 웃음이 감돌았어요.

'이 연세대학교에 들어오려고 삼수를 했어요, 내가. 삼수.'


그래. 네가 들은 게 맞다, 라는 듯 교수님은 몇몇의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시작하셨어요.

교수님은 삼수생이셨어요. 연대생이 되고 싶어 삼수를 하셨대요. 현역, 그리고 재수 생활 때 닿을 듯이 닿지 않은 연대가 가고 싶어 삼수를 하셨대요.


'많이 늦었지. 많이 늦었어요. 대학교도 늦게 왔으니, 군대도 늦게 갔고.'

어디든 따라다니던 '삼수'의 꼬리표가 교수님은 그렇게 힘드셨대요. 대학교 동기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형은 왜 이렇게 나이가 많아요?' 군대에서 만난 나이 어린 선임들은 '너는 뭐하다가 이제야 왔냐?'


삼수를 했다. 그래 내가 대학교 한 번에 못 들어가서 조금 늦었다. 사람들은 어딜 가나 교수님께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때마다 교수님은 같은 대답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그게 힘드셨대요.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게. 내가 괜스레 주눅드는 게. 많이 초조하셨대요. 나의 친구들은 이미 나보다 2년이 앞서있어서. 나는 2년 전에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교수님께는 꿈이 있었어요. 힘들었던 재수 생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삼수 생활을 이 악물고 버티게 해준 꿈.

어렵게 어렵게 삼수를 해가며 들어온 이 대학에서, '교수'라는 직함을 걸고 강단에 서는 것. 본인이 그렇게 사랑하는 이 학교의 학생들, 자신의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그게 교수님의 목표였고 꿈이었어요.


길고 힘든 과정이었다..고 얘기하셨어요. 군대, 학부 졸업, 대학원 진학.. 언덕을 하나 넘으면 다음에는 산.

주변에서는 '저 나이가 되도록 대체 뭘 하고 있느냐' 라는 말을 듣기 일수였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정말 맞는 길인가' 라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조교를 하던 때에는 목표를 공유하던 어린 동료들의 조롱까지.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조교해요?' 나이 차도 별로 안 났는데. 
'솔직히 교수하기엔 좀 늦지 않았어요?' 기껏해야 몇 년 늦었을 뿐인데.


쓰라린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으셨던 건지. 
쓴웃음을 지으며 교수님은 잠시 말을 멈추셨죠. 
이내 알 수 없는 미소에, 눈을 빛내며 입을 떼시던 교수님.

'근데 지금, 그 친구들 중에 교수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아요?'


침묵이 맴돌았죠. 그리고 교수님의 입가에 돌던 옅은 미소.

'나 하나에요, 나 하나.'

'내 자랑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늦은 건 없습니다."


우리만큼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없을 거에요.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며 살아왔잖아요. 옆집 철수가 국어에서 100점을 맞아오면 나는 수학에서라도 100점을 맞아야 했고, 이웃집 영희가 미국 유학을 갔다 오더니 how are you?를 원어민처럼 한다면 나도 암 파인 땡큐 앤쥬?는 좀 굴려야 했죠.


고등학교 때는 특목고다 뭐다, 과학고다 뭐다. 초등학교 동창이 유명한 자사고에 들어가면 어느새 모든 부모님들이 그 소식을 알고 있었고요. 대학 입시는 어땠나요. 나는 재수하는데 친구는 연세대 들어간 게 친구들 사이의 핫뉴스였죠. 우리는 항상 알게 모르게 남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어요. 남보다 뒤쳐지면 안되니까. 남들보다 늦으면 안되니까.


근데, 그러면 어때요. 남들이 뭐라 한들 어때요. 늦은 건 없어요. 중학교 때 반에서 꼴등하던 친구가 유학 가더니 하버드에 들어갔대요. 고등학교 자퇴한 친구가 어플 하나 만들었더니 대박이 났대요. 남들이 뭐라 한들, 어때요? 나는 나의 길이 있어요. 그게 지금은 남들이 보기에 늦어 보일 수도 있고, 내가 보기에도 남들보다 뒤쳐져서 불안하고 초조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길이 있어요.


거리에서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불편하잖아요. 남과 같은 길을 걷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저 눈치 보면서 공부만 하다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갖는 것. 물론 그것도 어떤 면에서는 정말 성공한 인생이겠죠. 그 길이 자신의 길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게 우리 모두가 가야만 하는 길인가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쳇바퀴만 돌리는 인생을 살 수는 없잖아요. 지금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나의 길을 묵묵히 찾아봐요. 모르겠으면 일단 한 길로 걸어봐요. 재수 삼수 사수 n수 하면 어때요. 취업 좀 늦게 하면 어때요. 아니, 아예 취업 때려 치고 다른 길을 찾아 좀 헤매면 어때요. '옳은 길'은 오직 나만 아는 거에요. 결국 그 모든 게 나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인 거고, 나는 내 인생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거에요. 누가 알아요? 나중에 자서전에 이렇게 한 문장을 넣을 수도 있겠죠.


'김연돌, 그는 대학은 네 번이나 떨어졌지만 인생은 한번에 합격했다.'

'늦은 건 없습니다.' 
교수님의 그 말이 요즘 들어 자꾸 생각나곤 해요. 소위 말하는 '늦는 길'을 제가 지금 걷고 있거든요. 그래서 불안해요. 그리고 초조해요. 하지만 다시 그 행보를 이어가고자 해요. 저는,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요.

늦은 건 없어요. 20대 밖에 안된 우리에게 대체 뭐가 그리 늦은 일이고 늦는 길이겠어요. 천천히 가는 길은 있어도 늦은 도착은 없는 거니까요. 남들보다 조금 천천히, 경치를 둘러보며 세상을 좀 더 알아가며 걸어갈 뿐인 거니까요.


삶에 조금의 풍파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저 다들 자신의 속도에 맞춰 기나긴 길을 걷고 있는 거겠죠.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천천히.

어느덧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2015년도 벌써 열 달이 흘러갔고요. 수능을 준비 중인 고3과 n수생들, 중간고사를 갓 마치고 푹 쉬고 있을 대학생들, 그리고 예비 직장인이 되기 위해 힘쓰고 있는 많은 분들까지. 저마다 나에게는 가장 높아 보이는 삶의 언덕을 하나씩 넘고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의 삶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오르막길이 있을 거에요. 오르고 올라도, 넘고 넘어도 계속되는 언덕과 오르막길. 다치기도 하고 많이 넘어지기도 할거에요. 그게 부끄러워 주저앉고 싶을 수도 있어요. 나보다 빨리 정상에 오른 저 친구들을 보며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결국에 당신은 당신만이 갈 수 있는 정상에 도달할 거에요. 물론 힘든 여정이 될 거에요. 지금도 이미 많이 힘들겠죠. 하지만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래서 이제는 다 놓아 버리고 싶을 때. 그 날의 백양관 대강당에서 나지막이 울려 퍼졌던 교수님의 한 마디를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늦지 않았어요. 당신은 틀리지 않았어요. 꿈을 찾아 가는 당신은 그 누구보다 빛나는 길을 걸을 거에요.

'늦은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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