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되돌아 봤을 때, 나는 미래에 '글 쓰는 과학자'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도 난 전적으로 이공계다 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나름의 문과적 성향도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미래엔 이런 나의 특징을 장점으로 살려서 내가 연구하는, 혹은 이 과학이라는 전체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런 생각은 평소에는 조용히 잠자고 있다가 분야에 상관 없이 좋은 글을 발견하여 읽거나 했을 때 특히 동기부여가 크게 되는 편인데, 그 중에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는 포인트 중에 하나는 적절한 비유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식에서 도넛이랑 프레첼이 나와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764164.html
물리학은 특히나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학문이다보니, 수상의 의의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름의 비유를 위해 도넛을 가져왔던 것인데, 물리학엔 젬병인 나도 이 기사를 읽고나서 전혀 모르겠던 학문이 나에게 어느정도 가까워진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묘했던 기억이 난다. 이 비유로 인해서 대중과 과학자가 가까워질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현상이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좋은 비유와 표현에 대한 욕심은 항상 가지고 있는 편이다. 블로그를 하면서 여러 글을 쓰고, 그 와중에 또 많은 매체에서 여러 글을 읽으면서 좋은 표현들을 잡아두려고 하는 편이고, 메모장에 내가 좋아했던 표현들은 점차 쌓여가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글을 꼽으라면 유아인의 편의점에 관한 짧은 수필을 가져오고 싶다.
내가 사는 아파트 1층의 편의점이 폐업했다.
편의점인데 12시면 문을 닫으니 나같은 올빼미의 편의에는 썩 맞지 않는 편의점이었다.
다른 편의점은 길 건너에나 있으니 이제부터 담배는 줄고, 충치가 덜 생기고, 더 건강해질 것이다.
처음 여기로 이사왔을때 자기 딸이 좋아한다며 싸인을 부탁하던 편의점 아줌마는 그 후로 내가 다녀가는 내내 끼니를 챙겨 묻고, 일은 잘되는지 묻고, 더 필요한건 없는지 물으며 서비스를 챙겨주었다.
밥은 먹었다고 했고, 일은 잘되고 있다고 했고, 더 필요한것은 없다고 했지만 기어코 옆구리로 찔러주시는 음료수를 받아들고 머쓱하게 감사인사를 하곤했다.
어떤 날은 그 친절이 너무 불편해서 담배를 참고 차에 올라타 매니저의 것을 뺐어 문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식사는 하셨냐는 그 흔한 인사 한 번 먼저 건낸적도 없을 만큼 나는 무심한 단골이었고,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아줌마는 내 이름 뒤에 '씨'자를 못 떼냈던 것 같다.
아인씨. 아인씨. 지독히도 불편한 그 이름. 아마도 대구의 부모님 집에 살며 학교를 다니거나 이렇게 밤마다 술을 푸겠다고 놀러를 다니거나 했다면 우리 엄마가 그러지 않았을까.
(물론 엄마는 나를 홍식이라고 하지만,)
난 또 그 마음이 그렇게 싫고 귀찮아 다정하게 대답 한 번 제대로 해주지 않는 무뚝뚝한 아들 노릇을 했겠지.
경상도 남자라 무심하다는 어쭙잖은 핑계로 10년쯤 후에는 매일 저녁 전화해 엄마의 안부를 묻겠다고 다짐한다.
어리석게도. 엊그제 마지막으로 편의점엘 갔을때. 그때도 이미 가득 찬 봉투 사이로 공짜 햇반을 꾹꾹 찔러 넣으며 아줌마는 내게 소녀처럼 수줍게 작별인사를 건냈다.
"일 잘되고, 담배 좀 줄이고 아, 나 교회가면 아인씨 기도 해요. 나 기도빨 진짜 잘먹거든. 그니까 아인씨 진짜 잘될꺼야."
그런 말엔 무방비였다. 습관처럼 감사하단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진짜요? 기대할께요!'
하며 장난스럽게 받아칠 그만큼의 세련된 구석도 내겐 없었다.
하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엄마에게 내가 느끼는것 처럼 죽도록 어색하고 간지러운 마음만 있을뿐.
서울에 사는 내내 1년 마다 집을 옮겨 다니며 만나왔던 기억도 나지 않는 우리집 1층의 편의점 아줌마, 아저씨, 알바생들.
내 엄마 보다더 자주 나를 맞이하던 그 사람들.
어쩌면 처음으로 그들중 한 사람의 인사를 진짜라고 믿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흐릿하게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나는 서둘러 편의점을 나섰다. 그날따라 문에 달린 방울이 더 요란하게 흔들렸다.
내겐 기억할 필요 없는 소리.
딸랑딸랑.
딸에게 조금 더 가까운 엄마로 돌아가는 편의점 아줌마에게 그 방울소리가 얼마나 아련하고 고된 추억일지에 대해 감히 추측해 본다.
어젯밤.
담배를 사러 나가며 같은 시간이면 원래도 불이 꺼져있을 그 편의점이 그렇게도 아쉬웠던 것은 굳이 횡단보도를 건너야하는 불편 때문이 아니라 이 정신없이 바쁜 세상에 12시면 문을 닫는 편치 않은 우리 아파트 편의점 아줌마의 지독히도 불편했던 친절 때문이었으리라.
뒷통수가 간지러운 과한 친절들을 뻔뻔하게 누리던 삶을 잠시 접고 밤이면 감지도 않은 머리에 모자하나 얹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나 사러 나가는 보통의 삶 속에서 내가 다시 그런 불편한 친절을 느낄 수 있을까 되뇐다.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가슴 뜨거운 행운이었는지.
문체가 화려하거나 과장되지 않은 채로 담담하게 써내려 가는 것 같은데 (심지어 나 비유를 쓴다! 하는 ~처럼, ~같이 ~한듯 같은 직접적인 비유를 위한 단어도 보이지 않는다), 읽을수록 상황이 더 머릿속으로 잘 들어오는 글인 것 같아서 몇 번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형용사의 마법같은 글이다. 여기서 몇 부분을 표시해 두었는데, 단조롭게 쓰자면 얼마든지 단조로워질 수 있는 글이 표시해둔 것과 같은 '살'이 달라 붙으면서 글이 더 읽기 쉬워지고 이해가 잘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기 같은 글에 감성이 더해지는 것들이 저런 표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이를 통해서 저자는 독자에게 내가 생각한 이미지를 상상에 무작정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독자는 이렇게 터놓은 길을 쉽게 읽어내려가며 공감할 수 있다는 것에 또 장점이 될 수 있다. 말러가 그의 교향곡에 무수히 많은 디렉팅을 적어 놓은것이 자신의 의도대로 연주되길 바랐던 욕심에서 나왔던 것처럼 내 글은 이렇게 읽어주세요와 같은 욕심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비단 이건 나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혹은 세련된 글을 쓰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위한 것 뿐만아니라 학위과정을 하면서도 '쉽게 설명하라'는 능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기에 신경써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물며 특정 연구실 내에서 하는 발표라도 서로 연구주제가 다를 수 있으니 기본적인 인트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대중에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짜야한다. 이런 '쉬운 설명' 에 대한 요구는 어쩌면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찰떡같은 형용사와 비유적인 표현들인 것 같다.
이는 단순히 대중들이 잘 모르니까 우리가 가르쳐야지! 라는 선민의식의 발로라는 느낌보다는, 내가 하는 연구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멋진 일이었는지를 자랑하기 위한 레드카펫을 손수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준비한 파티라면 당연히 내가 손수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박사과정 졸업생들의 디펜스가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이것이 갖춰지지 않으면 지도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교수진, 그리고 다른 학생들에게 내 연구의 매력적인 모습을 제대로 선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매력이 보이지 않으면 '그래서 이걸 왜 하는데?, 이게 왜 중요한데?' 에 대한 대답이 적절히 되지 않았다는 것이므로 뻘짓했다는 것으로 밖에 비춰지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말과 어려운 공식을 쓰는 것이 멋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좋은 글에대한 욕심은 좋은 연구실적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계속 나를 따라다닐 것 같다. 버킷리스트에 적어놓은 책 출판도 이렇게 글을 쓰다보면 누군가 함께 작업하자고 귀한 연락 주시거나 아니면 답답해서 내가 전자책이라도 내려고 해서 뭐가 됐든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생각도 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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