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인 고래라는 소설을 우연한 기회에 읽어보게 되었다.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추천하던 소설이라 접하게 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놀랐다. 보면서 와 이거 재밌네 라고 느꼈던 소설이 정말 오랜만이다.
내용 자체도 빠르게 전개될 뿐더러 화자의 문체가 판소리를 옮겨다 놓은 듯 하다. 가령 '이야기는 몇 년 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건은 뒤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등등 구어체로 소설속 화자가 구전동화를 들려주듯이 진행되는데, 여기에 들어있는 내용도 인상깊다.
소설 속 주인공인 금복과 춘희의 메이저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1950년대 전후의 시대적 배경, 구한말 느낌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읽으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펄 벅 (Pearl, S. Buck)의 대지 같은 느낌이 난다. 대지의 주요 줄거리도 주인공인 왕릉의 인생사를 훑듯이 서술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금복과 춘희에 대한 이야기를 쭉 풀어나간다.
금복과 춘희는 욕망이라는 카테고리안에서 대척점에 있는 주인공이다. 금복은 태어나길 시골에서 자라났지만, 타고난 미모와 사업수완을 통해서 욕망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물질에 대한 욕망 뿐만 아니라 성적인 욕망도 포함된다.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훨씬 높은 성취를 이뤄낸 그녀의 이야기가 보는이로 하여금 빠져들게 만드는데, 그녀의 삶에서 '적당히' 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과 사랑을 할 때도 뒤가 없을 것처럼 사랑하고, 돈을 벌어도 끝내주게 벌어제끼는 그녀의 모습이 사뭇 대단하다. 생선을 말려서 팔아 큰 돈을 벌고, 다방을 차리고, 벽돌공장에서 마지막 극장을 짓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에 대한 욕구가 엿보이는 부분이 많다.
그녀의 한 번 뿐인 삶에 대한 욕망은 엑스레이 사진을 찍고나서 더 도드라진다.
'그녀가 엑스레이 사진을 통해 발견한 것은 바로 죽음 뒤에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죽어지면 썩어질 몸'이란 말을 자주 되뇌었다. 그리고 곧 내키는 대로 아무 사내하고나 살을 섞는 자유분방한 바람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죽음과 벗하며 살아온 그녀가 곧 스러질 육신의 한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덧없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춘희는 금복이 낳은 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세속적인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금복이 MSG를 잔뜩 넣은 맵고 짜고 단 인스턴트 같은 음식이라면 금복은 식초와 겨자도 사치라며 오로지 육수의 닝닝한 맛을 극찬하는 평양냉면 같다. 그녀가 말을 못하는 탓도 있었겠지만, 돈, 명예 등에 전혀 욕심내지 않고 동네에 피어있는 개망초, 혹은 쌍둥이자매가 데려온 코끼리 등과 교감하면서 지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특별히 타고난 체격 덕분에 이후 벽돌공장에서 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지만 딱히 남한테 피해 안주고 그녀의 삶만 살다가 가고만다. 교도소에 들어간 것이 억울할 법도 한데 그런 분노의 정서는 그녀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 금복과 정말로 대비되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을 묘사하면서 전개되는 여러 이야기들은 흥미롭기 그지없고, 소설의 기막힌 우연성에 기댄 부분들 덕분에 더 흥미롭게 진행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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