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눈이 점차 녹으며 도대체 이 학교 캠퍼스의 잔디밭은 어떻게 생겼는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하던 4월쯤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려고 오피스에 있는데 교수님께서 들어오시더니 '내가 올해 70이 되어서 학회 주최측에서 초청을 받았단다. 여기 애들도 다 데려갈건데 너도 가고싶니?' 물으셔서 눈동자를 힘차게 좌우로 굴리니 대충 경비 지원받을 수 있다는 표정이어서 기쁜 마음에 승낙하고 연구실 구성원들과 함께 포스터발표를 하고 오게 되었다.
동기부여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학회에 가게 되는 것만큼 강력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 학회 확정으로 초록을 작성한 이후 한국의 지도교수님께 죄송할 정도로 실험을 여기서 더 열심히 했다. 나를 뺀 나머지 구성원들은 오래전부터 실험해온 데이터들로 밍기적 밍기적 포스터를 만들 때 내 것은 빈 백지여서 데이터를 채우기 위해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내내 아마 '포스터 인쇄만 끝나면..'하고 중얼댔던 것 같다.
다행히 기한 내에 완성이 되어서 참으로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그렇게 내 포스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겠나 싶기도 하지만 그 포스터 앞에 서서 간간히 오는 분들에게 설명해드릴 때마다 느꼈던 뿌듯함이 아마 그간의 고생에서 온 게 아닌가 싶었다.
포스터발표 말고도 작년 학회보다 훨씬 인상 깊은 경험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휴양지인 샌디에고에서 열린 덕에 보게 된 여러 자연경관들, 말로만 듣던 햇볕은 따갑지만 습하지 않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본 기후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학회 후에 다녀온 LA도 너무 멋진 도시였고 말이다.
앞서 언급한 것들은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인상이었다면, 또 다른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는 건 학회에서 자기 분야의 대가들이 보이는 대단한 열의였는데, 사람대 사람으로 어떤 존경심마저 일으키게 하는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학회 첫날 심포지엄에서 같은 분야에 있는 여러 교수님이 그간의 결과들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흔히 빅가이라고 불리는 교수님들의 발표에는 수많은 인원이 참석해서 경청하곤 했는데, 인상 깊은 점은 발표만 끝났다 하면 이쪽저쪽에서 손들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다른 빅가이로 일컬어지는 교수님들이었다는 것이다. 멀찌감치 뒤에 앉아있던 나는 그들이 보인 열의는 단순히 실적을 위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진짜로 자기 분야를 예정하는 것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라고 느꼈다. 마치 내로라하는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악장들 혹은 지휘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명이 '저희가 그동안 연구한 라흐 2번은 이렇고 연주는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발표하면 '오 신기하네요 그 부분은 오히려 루바토를 좀 덜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쪽 선율 강조해서 연주해보셨나요? 템포 땡겨보셨나요?' 하는 느낌.
저마다 학회에 오는 목적이 달랐을 것이다. 누구는 박사가 끝나가던 차에 포스닥 자리를 구하러 왔을 수도 있고, 누구는 인맥을 넓히러, 프레젠테이션하러, 혹은 나처럼 얼떨결에 부랴부랴 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학회의 목적에 잘 부합했던 모습은 그 연로하신 교수님들이 보이셨던 그 분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인 것 같았다.
지도교수님께선 발표 순서 말미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발표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42년간 이 분야에서 연구하면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행복하고요. 여러분들도 저처럼 행복하게 연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수십 년 몸담아온 분야에 대해, 여러 사람과 그간 연구 결과에 대한 안부를 주고받는 과정을 본 것은 급하게 간 것 치곤 과분할 정도로 좋은 경험이었다. 나도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 내가 종사한 분야에서 그동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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