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의 세계는 정말로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어떤 곡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가령 여기서는 밝고 쾌활하다가 지나서는 애잔하게, 혹은 어느 부분에선 고조되는 등 모든 느낌을 화음을 조절함으로써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 따지고보면 음악하는 사람들은 이 화음의 세계를 이용해서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청중을 더 큰 감동과 환호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가장 잘 알려진 몇가지 예시를 들어보며 이를 살펴볼까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에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이 있습니다. 길고 긴 클라리넷 선율을 거쳐 쌓이는 선율과 절정에 이르기까지 고조되는 느낌, 그 해결까지 그 감동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장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지요. 어떻게 이 과정을 라흐마니노프는 그려냈는지 화성학의 관점에서 살펴볼까 합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몇가지 화성학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언급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화음은 특정 조성에서 (C Major, d minor 같은) 그 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화음부터 I, II, III ... 등으로 숫자를 붙여서 화음에 이름을 붙입니다. 현대에 와서는 각각의 화성에 그냥 이름을 붙여서 C, Dm, G7, Am7 등으로 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각 조성에 대해서 번호를 붙여놓고 보면 우리는 조성만 다르지 공통적인 흐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흔히 가요에서 머니코드 (Money Chord Progression)라고 불리는 화성은 조성에 상관 없이 특정한 패턴으로 진행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곡들도 이런 곡들에 리듬이 바뀌고, 조성이 바뀌고, 사람이 바뀌고, 메인 멜로디가 바뀌어서 다르게 들릴 뿐 비슷한 진행을 하고 있는 곡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곡가마다 다르긴 하지만, 메인 멜로디를 생각해두고 이 멜로디를 두고 어떻게 화성을 진행할지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작곡의 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는 화음의 해결입니다. 화음의 해결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듣기에 불편하게 들리는 소리가 쨍한 화음으로 바뀌면서 불편한 감정을 쓸어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듣기에 거슬리는 소리가 갑자기 아름다운 화음으로 바뀌었을 때 나타나는 카타르시스는 많은 곡들에서 사용되는 주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더 극적으로 곡이 바뀌고 청중의 마음을 저 아래에서 저 위로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화음의 해결을 단순하게 매번 쉽게 던져주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이건 마치 문제를 학생에게 던져주고 고민할 시간도 없이 답지를 함께 제시하는 것 혹은 답이 뻔히 보이는 문제를 주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학생은 처음에는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깊이가 얕다고 느끼고 다른 문제집을 사러 서점으로 향하겠지요. 이처럼 화음을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떻게 해결하느냐, 그 과정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작곡가들은 이를 발전시키고 발전시켜서 쉽게 해결하는 화음을 안주면서 고조시키는 방법을 터득했지요. 그것이 앞서 언급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에서 나옵니다.
위 표시된 악보에서 볼 수 있듯, 이 악장은 아마 제가 들어본 클래식 중에서 가장 길게 제대로 된 해결화음을 안주고 진행시키는 악장인 것 같습니다. 자그마치 20여마디를 adagio 악장에서 끌고가며 분위기 자체를 고조시키는데요. 어떻게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긴 마디를 해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여기서 시작은 B 코드로 시작합니다 (B-D#-F#). A major 곡에서 II 화음 (2도 화음)이지요. 더 자세하게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II 화음은 V 화음 (5도 화음)으로 가서 해결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B-D#-F#은 V 화음인 E-G#-B (혹은 B-E-G#)로 가려는 성질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B를 가지고 있기에 D#에서 반음 올려 E로, F#에서 2도 올려 G#으로 가면 깔끔하게 해결 되는 상황입니다만, 라흐마니노프가 이걸 쉽게 둘리 없습니다. 처음 B-D#-F#을 던져주고 그다음엔 B-D#-G를 던집니다. 앞선 F#만 살짝 올린 상황인 것이지요. 이 또한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완전한 해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마디에서 해결하나 싶은데 이번엔 B-E-F#을 통해서 D#은 해결하지만, 해결했던 F#을 가져옵니다. 이 화음또한 해결이 되지 않은 화음이지요. 그래서 화음이 바뀌긴 했지만 해결은 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음에 이르러서야 던지는 것이 Vm7코드입니다. V코드가 정석적인 모범 답안이라고 한다면, Vm7은 약간 멜랑콜리한 화음을 섞어서 (E-G-B-D, or B-D-E-G) 던지는 답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뭔가 찝찝하게 맞는 느낌인 것이지요.
이 진행을 통해서 라흐마니노프는 청중을 오아시스를 찾는 사막의 여행자처럼 다뤄서 더더욱 갈증을 일으킵니다. Vm7은 오아시스 대신에 던져진 바위 아래 고인 물방울 정도라고나 할까요. 더더욱 청중은 이를 갈구하게 되고, 결국에 이렇게 화음 세개 중에 해결해야 하는 음을 한 번은 이걸 해결하고 한 번은 다른걸 해결하지만 동시에 두개를 해결 하는 것은 끝에서야 주는 방식을 통해, 즉 화음을 쥐었다 풀었다 하면서 마지막에 넓고 넓은 오아시스를 던져줍니다. 그래서 그 거대하고 웅장한 카타르시스가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이지요.
바이올린 악보만 보면 사실 계속해서 같은 리듬을 유지하며 음계만 반음씩 상향시킬 뿐이지만, 그 아래에서 베이스 음으로 화음을 바꿔주는 악기들이 이 곡을 고조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던 것입니다. 가장 잘 들리는 선율에서 화음 바뀌는걸 너무 티나게 주면 곡이 너무 시시해지니까요. 그래서 많은 작품들에서는 주요 선율에 화음이 바뀌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현악기에선 비올라, 첼로에 관악기에선 호른, 바순 등에 슬쩍 화음을 바꿀 중요한 음들을 넣어서 청중들이 바뀌었다는 것을 단 번에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지요.
이렇듯 작곡가들이 설치해둔 이런 작곡 기법에는 여러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너무 전문적인 지식으로 갈 필요는 없지만 이렇게 조절하는 것도 있구나 하고 알아두시면 감상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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